쿠로켄 전력 주제 피어나다
꽃이 피고 나무가 푸르러지고 예쁘게 물들이는 가 싶더니 어느 새 눈이 내리고 있었다. 가지마다 눈꽃을 매달고 자태를 뽐냈다. 계절이 한 바퀴를 돌아갔으나 생활에 있어 변화는 없었다. 햇빛을 받아 옷깃을 여미고 사람들 사이로 들어갔다. 복잡한 거리를 지나 일터로 들어가는 생활에는 계절이 바뀌어도 변함은 없었다. 소복히 쌓인 눈을 밟으며 발걸음을 재촉하는 사회 안에 켄마 역시 포함되어 있었다. 익숙하게 대중교통을 이용하고 사람들 사이에 낑겨 걸령는 전화를 받으며 사람들 사이에서 편하게 다리를 움직였다. 턱선까지 내려오던 긴 머리를 짧게 자르고 손에서 떼지 않던 게임기를 내려놓았다. 켄마의 손에는 키보드와 펜들이 자리를 잡았고 게임에 눈을 반짝이던 켄마는 이미 과거의 이야기였다.
어린 시절을 함께 장식했던 소꿉친구는 어느 새 옆에서 함께 발걸음을 맞추며 손을 잡고 걷는 연인이 되어있었으나 한 살이라는 차이는 그들의 사이에 벽을 쌓았다. 같이 걷던 발걸음이 허전한 느낌이 들었을 때, 쿠로오와 켄마는 서로에게 이별을 고했다. 학교를 먼저 떠나 사회에 발을 들여 세상에 다시 눈을 뜬 쿠로오는 켄마의 손을 놓았고 켄마는 그저 고개만 끄덕이며 쿠로오를 보냈다. 절대로 갈라지지 않을 거라고 생각했던 그 길에서 둘은 갈림길을 마주했고 결국 각자 원하는 길로 발을 옮겼다. 갈라진 길 사이사이에 쿠로오는 존재하지 않았고 켄마는 그렇게 서서히 쿠로오를 지워갔다. 졸업과 함께 사회에 발을 들인 켄마는 점차 사람들 사이에서 사는 법을 배웠고 자신만의 길을 만들었다.
어우러지는 방법을 배웠고 혼자 살아가는 방법을 배웠다. 긴 단발로 내려오던 머리 길이에 손을 댔다. 짧아진 머리는 어색했고, 켄마를 다른 사람으로 만들었다. 고교까지만 하려고 다짐했던 배구는 쿠로오와 이별 이후 공을 손으로 잡은 적이 없었다. 일상에 녹아들어 공이라는 것을 잡을 시간조차 없었다. 눈으로 보이는 배구용품들은 켄마에게 간간히 향수를 불러일으켰다. 켄마의 시선을 사로잡은 배구화는 켄마를 매장 안으로까지 끌어들였다.
어서 오세.......
켄마를 끌어들인 배구화는 오랜 시간 잊고 지냈던 소꿉친구마저 켄마에게 이끌었다. 사람 좋게 웃으며 들어온 손님을 맞던 쿠로오의 입꼬리가 점점 내려갔다. 얽힌 시선에서 침묵이 돌았다. 두 개의 노란 눈동자가 마주쳤으나 오고가는 말 한 마디 없었다.
신발, 보려고요.
켄마의 입술이 떨어졌다. 얽힌 시선에서 일반적인 안부 인사마저 오고가지 않았다. 시선을 피하며 신발을 보고 싶다는 켄마의 말에 쿠로오는 짧게 헛웃음을 쳤다. 점점 굳어갔던 얼굴에 쓴 웃음이 피었다. 삼 년만에 만난 소꿉친구는 차갑게 외면하며 손님으로서 자신을 맞았다. 신발을 보여 달라는 짧은 말과 함께 끊어진 시선에 쿠로오의 눈동자가 허공을 맴돌았다.
네, 이쪽으로 오세요.
손님을 맞이하는 미소로 입꼬리를 올렸으나 어두운 표정마저 숨겨지지는 않았다. 켄마가 원하는 디자인을 선택하고 사이즈를 말하지 않았으나 쿠로오는 말도 없이 맞는 사이즈를 들고 자연스럽게 켄마 앞에 한쪽 무릎을 꿇었다. 신발을 직접 신겨주고 사이즈를 체크하며 신발끈까지 예쁘게 묶어주는 쿠로오의 손길이 다정했다.
혼자 신발 사러 오셨네요.
이제는, 괜찮아요.
앞뒤가 맞지 않는 대화였으나 서로만이 이해할 수 있었다. 타인을 거북하게 느꼈던 켄마가 혼자서 많은 인파 속으로 들어온 사실만으로도 많은 시간이 흘렀다는 걸 피부로 느꼈다. 정리까지 말끔하게 해 주며 말없이 켄마의 발만 쳐다보던 쿠로오의 고개가 올라왔다. 다정한 눈빛과 같이 올라간 입꼬리에 고등학교의 추억이 머리를 스치고 지나갔다. 교복을 입고 있는 쿠로오가 순식간에 시야 들어왔으나 짧은 환각은 오래 가지 않았다. 결제하겠다며 자리에서 일어난 켄마의 뒷모습만 바라보던 쿠로오는 매장을 나서려는 켄마의 어깨를 붙잡았다. 붙잡는 손길에도 고개는 돌아가지 않았다. 부르지 마, 쿠로.
그래도 오랜만에 만났는데, 번호라도 좀 주고 가요.
* * *
핸드폰에 찍혀가는 숫자를 보며 입꼬리가 한 없이 올라가려는 것을 겨우 막았다. 번호를 찍어놓고 도망가듯이 매장을 나가는 켄마의 뒷모습에 정신이 팔렸다. 다시 검정으로 돌아간 짧아진 머리와 많은 인파 속에서 혼자 무심하게 매장으로 들어온 켄마를 보며 쿠로오는 부재를 더 실감했다. 노란 눈동자와 눈이 마주치고 쿠로오는 교복을 입은 예전의 켄마가 스쳐지나갔다. 손을 잡아도 얼굴을 붉히고 얼굴이 가까워지면 시선을 숨겼다. 먼저 졸업을 한 쿠로오와 고등학교 삼 학년이 되어버린 켄마에게 연애는 점점 짓눌려갔고 결국 이별을 고했다. 이어주는 연락마저 끊겨 삼 년이라는 시간에 각자의 길을 걸었다. 평범하게 아르바이트를 하며 지낸 쿠로오에게 켄마를 다시 만날 수 있는 기회가 주어지리라고는 기대조차 하지 않았다. 이별을 고하고 손을 놓아버린 자신이기에 더욱 기회가 없을 거라고 생각했다.
안부 정도는 물어봐도 괜찮지 않을까 했었으나 쿠로오를 본 켄마는 그저 신발만 보러 왔다며 고개를 돌렸다. 말하지 않아도 켄마의 사이즈를 알고 있는 쿠로오는 신발까지 신겨주며 묘한 기분에 휩싸였다. 도망치지 않을까, 불안감이 온몸을 엄습했으나 켄마는 묵묵히 자신의 번호를 입력하고 매장에서 멀어졌다. 통화음이 길게 울렸다. 받기를 고민하는 켄마의 모습이 눈에 선했다.
[여보세요.]
저 지금 끝났어요.
사소한 것부터 시작했다. 오늘 매장에서 있었던 일들을 자질구레하게 늘어놓으며 켄마가 종료 버튼으로 전화마저 끊어버렸는지를 쿠로오는 수시로 확인했다. 흘러가는 통화 시간이 화면에 뜰 때마다 쿠로오는 올라가는 입꼬리를 간신히 눌렀다. 모든 일들을 털어놓자 머리가 비어버린 주머니가 되어버렸다. 할 말이 생각나지 않았고 하고 싶은 말들도 생각나지 않았다. 휴대폰 너머에서도 켄마의 목소리는 들리지 않았다.
어떻게 지냈어, 켄마.
뱉어놓고 후회했다. 달라졌다는 모습만 봐도 어떻게 지냈는지가 보이는데 안부를 이제서야 물었다. 쿠로오는 뱉어버린 말을 주워담고 싶었다. 흐른 시간에 자비는 없었고 그저 침묵만이 도는 휴대폰을 종료시키고 싶었다. 켄마와 겨우 닿은 연결고리였으나 쿠로오는 이대로 켄마가 전화를 끊었으면 하는 소망에 사로잡혔다.
배구를 그만뒀어.
자신과 시작했던 배구를 그만뒀다는 말에 쿠로오는 숨을 들이쉬었다. 어떻게 지냈는지 설명하지 않아도 켄마의 과거가 눈에 환영처럼 흩뿌려졌다. 끝없는 정적이 수시로 찾아왔다. 말을 잇고 싶었으나 이어갈 말조차 생각나지 않았다. 전화기를 붙잡은 손이 축축해졌다. 미끄러져도 이상할 게 없는 감촉에 손을 바꿔 축축한 손을 바지에 문질렀다. 화면에서 흐르는 시간들을 그대로였으나 너머에서는 숨소리조차 들리지 않았다. 발걸음을 멈춘 쿠로오의 시야에 들어온 건 켄마의 집이었다. 여전히 불이 켜져있는 방을 확인하며 쿠로오는 조심스레 입술을 떼었다.
나와, 켄마.
급하게 창문이 열렸다. 전화기를 귀 옆에 붙이고 집 앞에 찾아온 쿠로오를 보는 동공이 미세하게 떨렸다. 볼 옆에서 휴대폰이 멀어지고 끊어졌다는 알림이 울렸다. 벽 너머로 시선이 얽혔다. 창문에서 떨어질 생각을 하지 않는 켄마의 시선은 움직이지 않았다. 어둠을 밝히는 가로등 아래 자신을 쳐다보고 있는 쿠로오에게 박혀 미세하게 흔들림만 유지했다. 시선을 먼저 끊어버린 건 쿠로오였다. 고개를 돌려 어둠으로 시선을 돌렸다. 창문에서 언제 떨어져 밖으로 나올지 모르는 켄마를 보고 있자니 요동치는 심장을 주체할 수 없었다. 언제 문을 열고 모습을 보여줄지 짐작조차 가지 않았다.
열리는 문과 함께 짧아진 머리의 켄마가 모습을 보였다. 머리로 뻗으려는 손을 간신히 누르고 켄마의 얼굴을 가득 담았다. 오늘 매장에서 산 신발을 신고 네코마의 져지를 두른 켄마에게 고등학교의 환상이 순간적으로 스치고 지나갔다. 문 앞까지 나왔으나 쿠로오와 얽힌 시선에 차마 고개를 돌릴 수 없었다. 같이 배구를 시작한 친구이자 같은 길을 걷던 옛 연인이 삼 년이 지난 이십 대의 초반의 삶에서 다시 마주했다. 얽힌 시선과 열리지 않는 입술이 부조화했다. 입술이 몇 번 달싹였으나 먼저 목소리를 내지는 않았다.
보고 싶었어, 켄마.
켄마를 부르는 목소리가 미세하게 떨렸다. 손을 잡지도 않고 떨리는 목소리로 얘기를 꺼낸 쿠로오의 고개가 떨어졌다. 가려진 얼굴이 제대로 보이지 않았다. 얼굴에서부터 바닥으로 떨어지는 물방울에 켄마의 손이 먼저 쿠로오의 손목을 잡았다. 미세하게 떨리는 어깨를 그냥 둘 수 없었다. 고개마저 들지 않는 쿠로오를 문턱 너머로 끌어당겼다. 울고 가. 문턱을 넘는 발걸음이 무거웠다. 그치지 않는 눈물에 소매를 눈으로 비볐다. 또렷하게 변한 시야가 다시 물기로 가득해졌다.
쿠로오의 앞에 앉아 조용히 눈물을 그치기를 기다렸다. 오랜 시간 아래로 떨궈진 고개가 들리기를 기다렸다. 붉어진 눈이 켄마의 눈동자와 마주쳤다. 켄마의 시야가 흐려졌다. 쿠로오의 눈물이 멈추자 켄마의 눈에 차오르기 시작했다. 눈커풀을 느리게 깜박였다. 고인 눈물이 누르는 압력에 의해 볼을 타고 바닥으로 떨어졌다. 켄마의 입술이 점차 열렸다.
나도 보고 싶었어, 쿠로오.
* * *
이십 대 초반의 삶에서 재회한 연인은 다시 시작하는 말도 없이 자연스럽게 만남을 지속했다. 서로를 기다리는 일이 잦아졌고 오가는 대화 없이도 즐기는 법을 알았다. 각자의 시간을 존중하며 만남에 있어 서로에게 소홀하지 않았다. 서로를 보며 웃는 날이 많아졌고 사소한 것도 함께 하는 즐거움을 배웠다. 사소한 것이라도 서로를 떠올렸고 말에 귀를 기울이며 믿음을 유지하며 천천히 다시 만남을 시작했다. 쿠로오와 켄마의 재회는 많은 성장을 이루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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