쿠로켄 전력 주제 그림자
그림자처럼 어둠에 더 어울리는 아이였다. 타인이 거북해 타인을 경계하고 스스로를 구석으로 몰아넣는 켄마는 스스로도 밖으로 나오려고 하지 않았다. 안락한 자신의 자리를 찾은 사람처럼 스스로를 가둔 켄마의 그림자는 벽을 쌓고 켄마를 꽁꽁 숨겼다. 벽 너머로 아무도 켄마를 부르려고 하지 않았다. 혼자만의 세상에 갇혀 좋아하는 일을 하며 혼자가 되어버린 켄마를 세상 누구도 신경쓰지 않았다. 외로움을 느낄 새가 없었다. 손 안에 쥔 파란색의 게임기는 켄마를 항상 새로운 세계로 인도했다. 어제의 영웅이 오늘은 악역이 되었으며 누르는 버튼 하나로 조종이 가능한 주인공으로 결말까지 눈 앞에서 확인하는 쾌감은 말로 표현할 수 없었다. 손 안에 쥔 판타지 세상은 켄마에게 유일한 친구였다. 하나의 게임이 끝나면 다른 게임이 새로 쥐어졌다. 지겹도록 반복하는 게임의 공략까지 한 번에 외울 정도로 켄마는 귀를 닫고 손에 쥔 새로운 세상에 몰두했다. 켄마를 가둔 벽은 점점 높아졌고 안에서도 밖에서도 벽을 부시려는 노력따위는 없었다.
나랑 놀자.
손에 쥔 세상에만 몰두하던 켄마의 벽을 멋대로 부쉈다. 게임기가 바닥으로 추락했지만 켄마의 시선은 자신의 세상을 부순 소년에게 향했다. 눈에 보이는 그림자가 길었다. 손을 잡고 벽 밖으로 끌어당긴 소년의 손에는 작은 공이 들려있었다. 소년의 손에서 움직이는 공을 본 켄마는 새로운 게임에 시야가 트였다. 켄마의 손을 떠난 공은 소년의 손으로 향했으나 작은 네트를 넘지 못한 공은 다시 소년에게로 돌아왔다. 그마저도 즐겁다는 듯 웃는 소리가 켄마의 고막을 간지럽혔다. 버튼 하나만 누르면 조종되는 주인공과는 다른 게임이었다. 원하는 방향으로 공을 던진다는 것 자체가 난이도가 높았다. 작은 네트였으나 그 너머로 넘기는 것마저 둘에게는 힘들었다. 튕겨나오기를 수십 번이었으나 소년은 켄마 앞에서 소리 내어 웃었다.
"나랑 배구하자."
소년의 얼굴은 보이지 않았다. 까맣게 보이는 소년의 얼굴은 그의 목소리만 켄마에게 전달되고 있었다. 들고 있던 공을 켄마의 품에 안겨주며 자신과 함께 하자고 이끌었다. 타인은 거북했다. 이끄는 손을 뿌리치려고 수도 없이 도전했으나 소년의 악력은 강했다. 아니, 이미 자기보다 키가 한참은 커져있었다. 이끌린 손은 배구부에 도착했고 켄마는 세터라는 자리에서 모두에게 공을 던지는 역할을 맡았다. 팀이라는 곳에 소속한 경험이 전무했던 켄마는 누군가에게 공을 던진다는 것조차 두려웠다. 자신에게 집중된 시선이 두려웠고 자신이 던지는 공을 기다리는 것이 두려웠다. 손을 떠나버린 토스마저 스파이크에 걸림돌이 되는 것이 두려웠다.
"괜찮아, 켄마!"
소년은 항상 켄마를 위로했다. 손 끝에서 실수가 전해지면 켄마의 고개가 제일 먼저 떨궈졌다. 타인과 같이 하는 게임은 어려웠다. 손 안에서 손가락만 놀리면 되는 세상과 비교되었다. 처음으로 어우러지는 팀 안에서 위축되는 켄마를 위로하는 건 소년이었다. 그 누구도 켄마의 실수를 지적하는 팀원들은 없었으나 풀이 죽은 켄마에게 소년의 목소리는 제일 먼저 닿았다. 공이 이어지지 않는 배구에 기가 죽어버린 소년의 손을 잡고 어깨를 도닥이는 느낌은 켄마에게 새로운 의욕을 심어주었다.
켄마의 토스가 정확하게 스파이크의 타점에 닿고 소년과 팀과 함께 어우러지는 배구가 익숙할 무렵, 소년은 켄마 곁을 떠났다. 네트 옆에서 공을 보냈으나 정확한 타점에 닿는 손바닥은 소년이 아니었다. 네트를 넘어 바닥으로 향하는 공을 튕기는 사람도 소년이 아니었다. 같은 코트에 소년은 그 어디에도 존재하지 않았다. 이상할 것이 없었으나 목소리만 남기고 코트를 떠난 소년의 얼굴이 머리 속에서 그려지지 않았다. 그 어디에도 소년의 신발소리마저 없었다. 새롭게 꾸려진 팀들이 훌쩍 큰 켄마와 함께했고 켄마의 토스를 받아 네트 너머 정확하게 스파이크를 쳤다. 켄마의 옆에 소년은 없었으나 빈자리의 감각마저 느껴지지 않았다. 켄마의 뒤를 이어 팀을 꾸려갈 세터가 나타났고 요령을 알려 주며 다시 배구에 재미를 붙이기엔 짧은 시간은 순식간에 지나갔다.
"코즈메 선배! 감사합니다!"
품 안 가득 꽃을 안겨주며 허리를 숙여 인사를 했다. 모두의 입가에 얼린 웃음과 함께 흐르는 눈물들이 모두 켄마를 향했다. 켄마를 막았던 벽들은 이미 전부 허물어져 빈 공간만 남아있었다. 켄마는 처음으로 타인 앞에서 웃었다. 품 안에 가득 안긴 꽃들과 지금까지 같이 배구를 했던 팀원들을 향한 아쉬움이 몰려왔다. 젖은 시야를 숨기려고 애썼다. 새로 꾸려진 팀들이 켄마의 뒤를 지켰다. 한 계단을 올라간 켄마는 그곳에서 소년을 다시 만났다. 자신을 향해 손을 흔들며 켄마를 반기는 소년이 그 계단에 있었다.
* * *
"일 학년 뭐 하는 거야. 빨리 안 해?"
공 여러 개를 안고 있던 켄마의 품에서 빠져나간 공들이 체육관 사방에 흩어졌다. 기다렸다는 듯이 켄마를 날아오는 날카로운 지적들은 켄마의 심장을 향했다. 바닥에 흥건한 공들을 다시 주워 품에 안은 켄마의 발걸음이 빨라졌다. 소년과 함께 하는 배구가 좋았는데 새로운 팀을 만나 배구를 시작하기도 전에 켄마는 선배라는 커다란 장애물에 발목이 잡혔다. 세터로서 스파이커에게 공을 토스하기는 커녕 공조차 제대로 잡아보지 못했다. 체육관 바닥을 닦는 것도 모자라 연습의 뒷정리는 모두 일 학년의 몫이었다. 소년의 손을 잡고 타인과 섞였으나 켄마는 기름처럼 타인에게서 멀어졌다. 켄마를 향한 소년의 시선은 닿지 않았다. 켄마에게 닥친 이 현실이 잔인하게 느껴지는 게 전부였다.
"켄마."
"나 배구 안 할래."
"켄마. 관두지 마"
이름을 부르는 목소리에 단호함이 느껴졌다. 위에서 누르는 압력을 오래 버텨왔다. 새로이 들어온 팀에서 공 한 번 제대로 잡아보지 못한 켄마의 허전한 손에는 다시 게임기가 쥐어졌다. 버튼으로 조작이 가능한 게임의 세상에 다시 몰두한 켄마는 손을 이끈 소년과 함께 했던 추억들을 모두 버린다고 선언했다. 배구를 그만두고 자신만의 세상으로 다시 들어가겠다고 말하는 켄마의 뒤에 어두운 그림자가 가득했다. 빛으로 나온 결과는 처잠했다. 소년과 함께 해서 즐거웠던 배구의 길 앞에 커다란 장애물이 소년과 켄마의 사이를 가로막았다. 노력을 해도 넘어지지 않은 큰 벽에 결국 포기를 선언한 켄마를 소년은 놓아주지 않았다.
"지금 일, 이 학년은 너의 굉장함을 알고 있어."
소년의 진지한 목소리는 켄마의 발목을 잡았다. 미간을 좁히며 완강하게 거부했으나 소년의 눈빛은 진심이었다. 다시 팀을 끌어올리고 강하게 만들기 위해선 네가 필요하다는 말 하나로 켄마의 마음을 잡았다. 커다란 장애물에 넘어진 켄마를 일으켰다. 장애물에 걸리고 싶지 않아 어우러지는 게임에 선을 긋고 손 안의 세계에 몰두하는 일이 잦아졌으나 소년의 한 마디에 켄마는 배구공을 손에서 놓지 않았다. 입술을 물고 누르는 압력을 버텨내며 소년과 같이 있었다. 켄마를 향한 날카로운 말들은 소년과 함께 버텨나갔다. 제대로 된 경기라고는 뛰어보지 못했지만 지쳐 무릎이 꿇리면 소년의 손이 눈 앞에 나타났다. 몇 번이고 도망치고 싶었던 켄마의 손을 잡은 소년은 켄마의 버팀목으로 함께했다.
주전 세터로 자리를 잡은 켄마의 옆엔 주장으로 직위가 올라간 소년이 있었다. 타인을 꿰뚫는 관찰력으로 네코마를 일으켜 세웠으며 새로운 사람들로 꾸려진 팀들은 안정적인 플레이를 자랑했다. 켄마를 향한 날카로운 언어들도 독촉하는 말들도 코트 위에서 사라졌다. 조금의 실수로 켄마를 질책하는 팀원들도 코트 위에 없었다. 격려하고 의지를 돋우며 어우러졌고 팀의 플레이는 고양이처럼 유연했다. 켄마가 가지고 있는 관찰력을 따라갈 수는 없었으나 팀원 한 명 한 명이 상대를 해석하는 능력이 뛰어났다. 켄마는 소년과 함께 하고 팀과 함께 하는 배구가 좋았다. 경기가 끝나 숨이 턱까지 차오르는 건 싫었으나 뒤를 지켜주는 팀원들이 좋았다.
"켄마 선배! 토스 올려 주세요!"
귀찮게 달라붙는 일 학년이었으나 싫지 않았다. 하이바의 의욕과 키는 켄마의 팀을 충분히 강하게 만들었다. 토스를 올려 달라며 꽁무니만 졸졸 쫓아다니는 하이바였으나 켄마에게 있어 장애물은 되지 않았다. 어린 일 학년들의 의욕을 보고 관찰하는 일은 켄마에게 있어 새로운 경험이었다. 카라스노의 히나타와의 만남도 새로웠으나 히나타의 플레이는 켄마에게 새로운 세상을 안겨주었다. 손 안에서 움직이는 주인공이 아닌 스스로의 의지로 움직여 작은 키로 날아다니는 히나타는 새로운 관심의 대상이었다.
"쇼요는 항상 새로워."
"넌 꼬맹이의 시합을 볼 때면 새로 산 게임을 시작할 때와 같은 표정을 지어, 켄마."
"뭐야, 그게 무슨 표정인데."
"두근두근한 표정."
"그런 적 없어."
흐뭇한 웃음이 소년의 입가에 걸렸다. 켄마의 의욕을 살리기 위해 관심을 보이는 히나타로 얘기를 시작했지만 결과는 켄마를 놀리는 것으로 마무리지었다. 대화에 켄마의 흥미가 쏠려 있다는 건 이미 눈치챈 사실이었다. 합숙을 시작하고 연습 시합을 계속하면서 켄마는 지쳤으나 손에서 공을 놓는 일은 없었다. 팀원들에게 부응하는 토스를 올렸으며 항상 같은 상대여도 달라진 부분들을 순식간에 잡아냈다. 자신의 팀이 점점 강해지며 성장하는 과정은 켄마에게 게임을 클리어하는 것보다 새로운 쾌감을 안겨 주었다.
"인터하이가 마지막이네."
소년의 목소리가 쓸쓸했다. 버튼을 끊임없이 누르던 손이 멈췄다. 켄마는 소년을 한 번 더 보내야 했다. 목소리만 들리는 소년을 향해 시선을 돌려도 켄마에게 닿는 건 목소리였다. 쓸쓸한 목소리와 함께 쓴 미소가 입가에 걸렸다. 소년의 고개가 켄마를 향해 돌아갔으나 켄마는 소년의 눈을 볼 수 없었다.
* * *
순식간에 눈꺼풀이 띄였다. 시간은 준비하기에 충분했다. 발을 땅에 내려놓으며 켄마는 긴 꿈을 곱씹었다. 어렸을 때부터, 바로 얼마 전까지의 내용들이 파노라마처럼 지나갔다. 봄바람은 차가웠으나 빠르게 핀 꽃들은 거리를 아름답게 꾸몄다. 온몸을 추운 바람으로부터 막았으나 켄마는 마지막에 손에 쥐었던 게임기를 내려놓았다. 어디를 가도 손 안의 세상은 놓은 적이 없었으나 오늘은 필요 없었다. 손 안의 파란색 게임기보다 다른 것을 손에 쥐는 게 더 중요했다.
품 가득 꽃을 안고 발걸음을 빨리했다. 여유를 부린 탓에 약속했던 시간보다 한참을 초과했다. 켄마가 발을 옮긴 곳은 학교 안이 아닌 체육관이었다. 학교 안은 많은 자동차들로 가득 찼고 사진을 찍기 위해 삼삼오오 모여있는 학생들로 북적였다. 많은 인파를 스쳐 체육관으로 발을 옮긴 켄마의 눈 앞에 팀원들이 기다리고 있었다.
"켄마, 지각이잖아."
쿠로오의 손이 눈 앞에 나타났다. 손에 소중하게 쥐고 있던 꽃다발을 쥐어주었다. 머리를 쓰다듬는 손길이 다정했다. 모이자고. 팀원들을 하나로 모이게 만드는 쿠로오의 목소리가 체육관에 울렸다. 네트도 없었고 운동복을 입고 운동화가 바닥에 마찰되는 소리도 들리지 않았다. 오늘만큼은 한껏 치장한 팀원들의 얼굴에 환한 미소와 아쉬움의 눈빛이 가득했다. 쿠로오를 중심으로 모여든 네코마 앞에 카메라가 섰다. 몇 번 깜박임을 보여주더니 화면 안에 가득 담긴 아이들의 모습이 찍혔다.
"쿠로오 선배, 야쿠 선배! 감사합니다!"
우렁찬 후배들의 목소리에 환하게 웃는 삼 학년들의 시야가 젖었다. 쿠로오의 손에 들린 졸업장이 낯설었다. 받은 꽃들을 전부 들고 졸업장까지 손에 쥔 쿠로오는 이제 정말로 성인으로 커 멀어진 기분을 떨칠 수가 없었다. 멀리 떨어진 켄마에게 천천히 다가오는 쿠로오가 유난히 크게 느껴졌다. 손에 들고 있던 모든 것들을 바닥으로 내려놓은 쿠로오의 품 안에 켄마가 가득 채웠다. 머리와 등을 다정하게 쓸어넘기는 커다란 손이 결국 눈물샘을 자극했다. 비슷하다고 생각했던 일 년 차이의 나이는 따라잡을 수 없는 거리였다. 아무리 노력해도 쿠로오는 먼저 사라지고 없었다. 입술을 깨물자 어깨가 작게 떨렸다. 토닥이는 손길이 따뜻했다.
"이제 네가 주장이야, 켄마."
"......."
"우리는 잠시만 떨어져 있는 거야."
젖은 시야에 가득 찬 쿠로오의 얼굴이 짖궂었지만 목소리만은 다정했다. 켄마에게는 한참 큰 자신의 운동복을 안겨주었다. 볼을 타고 흐르는 눈물들이 쿠로오의 스치는 손 끝과 함께 사라졌다. 교문엔 네코마 고교의 졸업을 축하한다는 현수막이 봄바람에 이끌려 춤을 추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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