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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HQ

[쿠로켄] 독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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쿠로켄 전력 주제 봄







공기는 차가웠다. 옷을 껴입어도 사이로 스며드는 찬바람을 막을 힘은 없었다. 벌어지는 옷을 꽉 쥐며 찬바람 사이로 발걸음을 옮겼다. 두꺼운 잠바에 목도리까지 칭칭 둘러맨 켄마는 장갑까지 장착하고 파란색의 게임기를 두드렸다. 입에서 나오는 하얀 입김이 공기의 온도가 어떤지 얘기하고 있었다. 빠르게 손가락을 움직이는 켄마의 입에선 목도리에 묻혀 입김도 나오지 않았다. 한 마디의 대화도 없이 서로 바쁜 발걸음만 움직이고 있었다. 켄마를 돌아봤지만 입에서 나오는 단어들은 없었다. 분명히 켄마에게 건넬 말이 있었는데 머리가 백지로 변해버렸다. 어디서부터 켄마와 함께 발을 맞추고 있었는지도 떠오르지 않았다.





쿠로오 선배!





리에프의 목소리는 멀리서도 쉽게 잡을 수 있었다. 리에프의 목소리에도 반응하지 않고 오로지 두 눈은 게임기에만 집중되어 있는 켄마는 곁에 다가와도 리에프를 향해 시선을 돌리지 않았다. 켄마가 익숙한 듯 리에프는 나에게로 달려와 우리 사이의 침묵을 깨버렸다. 에이스가 될 것이라는 것부터 시작해 리시브보단 스파이크가 더 황홀하다는 터무니없는 일 학년다운 이야기를 듣고 있으니 시선을 돌리자 이미 교문을 지나 학교 안으로 들어온 상태였다. 그제서야 고개를 들고 눈으로 인사를 하는 켄마를 이 학년 교실로 보냈다. 추웠다. 사방이 차가웠다. 저마다 추위를 피하기 위해서 갖은 방법을 썼지만 유난히 추운 날이었다. 바닥으로 내려앉는 눈들이 차곡차곡 쌓이기 시작했다. 하늘에서 내리는 하얀 색의 눈은 켄마를 게임기로부터 벗어나게 할 수 있을까. 터무니없는 생각이라는 것을 알지만 눈이라도 다시 보고 싶다는 어리석은 생각을 했다.





쿠로오, 너 왜 아침에 안 나왔어.





시야를 막는 야쿠의 목소리는 언제 들어도 날카롭다. 오늘 아침에 어디를 들리면서 아침 스트레칭을 가볍게 빼먹었다. 연락은 돌렸지만 못마땅한 표정의 야쿠는 그냥 넘어가기 힘들었다. 같은 삼 학년으로 리베로를 맡으면서 부주장의 역할을 제대로 해 주는 야쿠는 요즘 연습에 소홀한 내가 신경 쓰이는 게 분명했다.





그러니까 내가 가지 말랬잖아. 언제까지 그럴래?

모든 게 끝날 때까지?





평소처럼 대처하자 역시 주먹이 올라왔다. 이러지 말자, 야쿠. 키도 작아서 손도 작다. 작은 주먹을 감싸 옆구리에 붙여주자 어깨가 크게 올라왔다가 내려갔다. 숨을 크게 들이쉰 야쿠는 작작하라는 의미 모를 말만 남기고 교실에서 사라졌다. 야쿠가 무엇을 걱정하는지 누구보다 내가 잘 알지만 포기할 수 없었다. 배구부의 주장이라는 큰 어깨보다 지금 작은 소중한 것 하나가 우선순위였다. 켄마는 여전히 게임기에 눈을 박고 손가락을 움직이고 있을까. 리에프는 큰 키로 어디를 휘저어두고 있을까. 이런 잡생각들이 하나하나 모였으나 머리에서 내린 마지막 결말은 켄마였다. 여전히 혼자서 게임기만 누르며 수업 시간에는 눈만 붙이는 게 아닐까. 뿌리만 검은색인 머리는 분명히 튀기 쉬울 것이다. 켄마를 향한 자잘한 생각들은 꼬리에 꼬리를 물고 늘어지기 시작했다. 









옷깃을 여미던 차가웠던 공기는 이내 봄향기를 불렀다. 꽃봉오리들이 하나씩 열리기 시작했고 바람에 흩날리는 꽃잎들도 하나씩 늘어났다. 매서웠던 바람이 풀어질 무렵에도 우리의 사이는 제자리걸음이었다. 주먹다짐을 했던 것도 아니었고 말로 서로의 가슴에 상처를 새긴 것도 아니었다. 집에서 나와 학교를 향해 걷다 보면 옆에서 발걸음을 맞추는 켄마가 있었다. 여전히 게임기를 손에 쥐고 눈은 화면에 박힌 채 일어나지 않았다. 풀어지는 공기는 옷차림도 가볍게 만들었지만 여전히 오한을 느끼는지 목을 감은 목도리는 켄마의 목에서 떠날 생각을 안 했다. 손에 끼웠던 장갑도 그대로 끼우고 학교로 향했었다. 꽃잎이 유난히 많이 휘날리는 날, 켄마는 학교에 결석을 했다. 내 옆에서 발을 맞추던 켄마는 오늘 내 옆으로 다가오지도 않았다. 무슨 일이 생긴 걸까. 켄마가 눈에 보이지 않는 날이었으나 마음은 무섭도록 평온했다.





쿠로오, 오늘도 갔어?

모리스케, 내 집착 알잖아.





너 날이 갈 수록 수척해져. 야쿠의 목소리는 날카롭지 않았다. 이제는 걱정을 한 가득 담아 나에게 전달하고 있었다. 내가 수척하다는 생각은 한 적이 없었다. 최근에 몸이 가벼워진 것 같은 기분은 들었으나 다른 사람의 눈에 보일 정도로 수척함은 눈치채지 못했다. 입꼬리를 올리자 평소처럼 주먹이 올라왔다. 하지만 가볍게 어깨부근을 치는 야쿠의 행동으로 보아 분명히 내 상태가 걱정되는 게 확실했다. 야쿠는 이후로 배구 연습에 내가 없어도 혼자서 팀을 이끌었다. 규칙답게 주장이라는 이름은 달지 않았으나 주장이라고 해도 이상할 게 없었다. 창문에 비친 모습을 보자니 볼이 조금 들어간 것 같기도 하고. 입꼬리를 올리는데 쓴웃음이 나왔다. 예감이라도 한 듯 주머니의 핸드폰이 나를 부르고 있었다.





네, 쿠로오 테츠로입니다.





휴대폰 너머의 이야기는 예상했던 것이었다. 입꼬리는 올라갔으나 눈에서 주체할 수 없는 감정들이 흐르기 시작했다. 전화가 울릴 때부터 예측하고 마음의 준비까지 전부 끝났다고 생각했는데 귀로 들려오는 목소리는 그 상황을 모두 무너트려 버렸다. 그렇게 꽃잎이 비가 되어 내리는 날, 켄마는 내 곁을 떠났다. 추운 겨울, 신호를 위반한 트럭으로 인해 작은 몸이 날아가 바닥으로 추락했다. 게임하는 손이 시릴까 내가 선물했던 장갑을 처음 끼고 목도리를 칭칭 두른 켄마의 마지막 모습이었다. 미약하게나마 심장이 잡고 있던 생명은 결국 시간을 이기지 못하고 멈춰버렸고 나는 고등학교 삼 학년, 키가 작았을 때부터 나와 함께였던 켄마를 떠나보냈다. 여전히 켄마는 내가 끼워준 장갑과 목도리를 두르고 나와 발을 맞춰 걷는다. 오가는 문장들도 없고 입술이 열리지도 않지만 켄마는 내 옆에서 게임기를 두드리고 있었다. 이제 그런 켄마는 없었다. 같은 땅에서 숨을 쉬지 않고 땅 밑으로 내려가 조용히 눈을 감고 긴 잠에 빠질 것이다. 얼굴이 뜨거웠다. 볼이 축축했다. 입술을 깨물었으나 떨리는 어깨를 주체할 수 없었다.


그래도 다행이야, 켄마. 제일 예쁘다고 생각되는 날에 여행을 떠나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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